손정도 목사는 1910년 감리교단 중국 선교사로 파견돼 활동하다 12년 ‘가쓰라 암살음모 사건’의 주모자로 하얼빈에서 체포돼 참혹한 고문을 받았답니다. 가쓰라 다로 일본 총리가 만주를 시찰하는 기회를 이용해 암살을 기도했다는 게 일제의 주장인데, 손 목사는 증거도, 자백도 없는 상태에서 거주제한 1년형을 받고 전남 진도에 유배됐답니다.
유배를 마치고 풀려난 손 목사는 서울 동대문교회와 정동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이때 네덜란드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했다 폐위된 채 덕수궁에 유폐된 고종과 만나게 됩니다. 고종은 새로운 밀사 파견을 계획하고, 다섯번째 아들인 의친왕의 특사행을 추진할 인물로 손 목사를 주목합니다. 손 목사는 이에 정동교회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평양으로 가게 됩니다. 이후 그의 활동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집니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떠난 손 목사는 ‘호조(互助) 운동’에 마지막 힘을 다했답니다. 호조 운동은 서로 도우며 자급자족하는 이상촌을 건설하는 것으로, 최종 목적은 무력투쟁을 위한 독립운동 기지 건설이었답니다. 손 목사는 안창호와 함께 ‘농민호조사’를 설립하고, 만주 액목현 일대에서 토지를 매입합니다. 하지만 100여호가 입주한 농민호조 이상촌은 일제의 방해공작과 만주 침략으로 실패합니다. 고문 후유증과 지병에 시달리던 손 목사는 1931년 2월19일 오후 12시 눈을 감습니다. 그가 그토록 바랐던 조국 독립은 그로부터 14년이 지나서야 찾아왔답니다.
손 목사의 장남 손원일은 해군 제독이 되어 ‘대한 해군의 아버지’고 불리고 있답니다. 차남 손원태는 미국 유학 후 재미교포 의사가 됐답니다. 양자처럼 돌봐주고 후원한 소년 김성주는 북한 주석인 김일성이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