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29. 01:21

- 프로필 이력 경력

이름 본명은?
조광현 (曺廣鉉)

출생 나이 생일
1935년 3월 30일 (87세)

고향 출생지
경기도 김포군

사망일
2023년 3월 28일 (향년 87세)

학력
경복중학교 (졸업)
경복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 / 학사)

과거 경력
1962년 ~ 1995년 영진치과의원 운영
병역 군대 사항
군의관 전역

수상
1985년 제7회 치과의료문화상
1994년 제2회 서울치과의사회 공로대상
2008년 네이버 파워지식IN상

수호신
별명
지식인 할아버지, 수호신 할아버지, 핫바할배

2023년 3월 28일을 일기로 안타깝게도 운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아래는 과거 언론보도내용입니다.

매일 아내 간병 뒤 '지식인' 답변..83살 '네이버 스타' 조광현 할아버지
- 2018. 12. 23

인터넷을 할 줄 아는 한국인이라면 궁금한 게 있을 때마다 이곳을 꼭 한번은 기웃거려보았으리라. 인간이 물어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질문들이 집적되어 있는 곳. 초등학생의 질문부터 노인의 질문까지, 어렵고 복잡한 질문부터 단순하고 한심한 질문까지, 은밀하고 부끄러운 고백 같은 질문부터 사회 윤리에 부적절한 질문까지 품는 곳. 2002년 처음 시작된 네이버 ‘지식인(iN)’에는 지난 15일 현재 3억950만개가 넘는 답변이 쌓여 있습니다.


나 역시 대학생 때 그곳을 기웃거린 적이 있었다. ‘눈물 참는 법’이라고 검색했던 것이 기억난다.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지식인’이란 원래 그런 곳 아니던가. 비법들은 대체로 싱거웠다. 하늘을 쳐다봐라, 눈을 빠르게 깜빡여라, 눈물을 왜 참느냐 그것은 아름다운 영혼의 물방울이다…. 그러나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눈물’이라는 키워드에 함께 걸린 또 다른 누군가의 글 때문이었다.

한편 정확한 문구는 기억나지 않지만 요지는 이랬다. ‘나는 가수 보아와 동갑인 중학생인데, 왜 나는 모든 것이 그녀와 다른 것인지, 왜 나는 그녀처럼 될 수 없는지, 그 질투와 절망감이 극심해서 밤마다 많이 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아가 수년 동안 받았을 혹독한 트레이닝에 대해서까지 그녀는 잘 알지 못했던 것 같지만, 그럼에도 십대에 슈퍼스타가 된 가수가 같은 또래의 학생들에게 안겨주었을 박탈감에 대해서 나는 이때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애는 이 글도 울면서 썼겠지.’ 나는 울보의 촉으로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이 아팠다. 말하자면 ‘지식인’은 이런 기억들까지 덤으로 안겨주는 곳이었답니다.

그 기상천외의 문답의 현장에 2012년 크리스마스이브, 놀라울 만큼 깜찍한 답변이 등장했다.

문 산타 할아버지 나이는 몇살인가요?

답 아빠 나이와 동갑입니다.

곧장 이 답변자는 4천개가 넘는 공감을 얻으며 지식인의 스타가 된다. ‘녹야’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며 ‘지식인 할아버지’로 불리는 올해 83살의 조광현 할아버지는 그러나 반짝 스타가 아니었다. 그의 첫 지식인 답변은 2007년 9월(‘공개설정’한 답변의 경우)로 기록되어 있다. 할아버지의 답변 수는 지난 15일 기준으로 3만7978개에 이른다. ‘하수-평민-시민-초수-중수-고수-영웅-지존-초인-식물신-바람신-물신-달신-별신-태양신-은하신-우주신-수호신-절대신’에 이르는 길고 지난한 지식인 등급 가운데 그는 두번째로 높은 ‘수호신’이다. 2018년 10월 기준으로 절대신은 32명뿐이다. 아무튼 지식인 안에서 할아버지는 진정 ‘넘사벽’인 것이랍니다.

지식인의 ‘넘사벽’

“독거노인한테 무엇이 궁금해서 오셨나?”

현관(지난 12일 서울 마포구 자택) 앞에서 꾸벅 인사를 하고 엉거주춤 몸을 숙인 채 운동화 끈을 낑낑대며 풀고 있는 나에게 조광현 할아버지가 쑥스러운 듯 물었답니다.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었나, 영 불안하구먼.”

―잘못이라니요, 선생님. 건강은 괜찮으세요?

대단한 일을 해야 인터뷰라는 것도 하는 걸 텐데, 자신은 특별한 일을 한 게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할아버지에게 일단 식사는 잘 하시는지부터 물었다.

“요즘 혼자 밥해 먹는다니까 팬들이 반찬을 보내줘요. 주전부리, 간식도 보내주고. 그게 많은 도움이 돼요.”

―그래요? 어떤 걸 보내주나요?

“이것저것 많은데 주로 콩장이나 그런 거…. 잘 상하지 않을 만한 것들로.”

할아버지는 부엌 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식탁 위에 어지럽게 널린 약 봉지들 사이에 과자 봉지 몇개가 섞여 있었다. 채소로 만든 꽤 비싸 보이는 과자였는데, 그것도 팬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몸에 좋은 과자 같아요. 팬분이 선생님 건강 생각해서 보내신 건가 봐요.

“그래서 그런지 맛이 없어요.(웃음)”

―음식은 어떻게 해 드세요?

“아무거나 주워 먹지요. ‘내 입은 쓰레기통이다’ 생각하면서. 요리는 뭐 잡탕, 아무거나 쉬어버리기 직전 것들을 끌어모아서 밥이랑 같이 끓여 먹어요.”

거실 한편에 아담한 감사패 두개가 빛나고 있었다. 네이버로부터 받은 감사패들(2008년 파워 지식인 선정 등)이었다. 평소 지식인 활동을 어떻게 하시는지 묻자 할아버지는 안방 문을 열어 보였답니다.

“여기서 합니다.”

침대와 마주한 컴퓨터 책상 위에 직접 수건으로 제작한 손목보호대와 두대의 돋보기가 놓여 있었다.


―침대 바로 옆에 컴퓨터가 있네요.

“그래야 자다가도 일어나서 질문들을 들여다보고 하지요.”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손바닥 크기만한 아이콘들이 띄워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익숙하게 인터넷 창을 연 뒤 네이버 지식인에 접속했다. 시력과는 무관하게 그저 오랜 시간 손이 익혀온 습관처럼 보였다. 할아버지의 눈은 시력이 크게 손상돼 있었다. 그는 글씨들을 크기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읽어냈다. 큰 글씨는 안경을 조금씩 손으로 조정하며 파악했고, 작은 글씨는 양손에 든 돋보기 두개를 겹쳐 보며 확인했다.

―눈이 많이 안 좋으시다고 들었어요.

“이제는 돋보기 두개로 보지 않으면 잘 못 봐. 길을 걸을 때도 안 보이니까 돌이나 턱에 걸려 넘어질 뻔한 적도 많아요. 그래서 이제는 발을 높게 들면서 걷지. (시범을 보여주며) 이렇게 걸으면 턱에 잘 안 걸려요. 그래도 지금 요조씨 얼굴은 잘 보이던 것입니다.(웃음)”

―하루에 보통 답변을 몇개나 다세요?

“많은 날도 있고 적은 날도 있고. 나도 안 세어봤으니 모르지.”

그래서 내가 세어보았다.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평균을 내보니 보통 하루에 10개꼴이었다. 직접 질문을 고르고 ‘독수리 타법’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쳐넣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답변 10개를 적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 했답니다.

―혹시 지식인이나 선생님 블로그 말고 또 즐겨 찾으시는 사이트가 있나요?

“없어요. 나는 그 두개밖에 안 해.”

―아이디로 ‘녹야’(綠野)를 쓰시는데, 녹색들판이라… 선생님 호인가요? 지식인 사이트 색깔과 정말 잘 어울려요.

“그렇습니다, 제 호예요. 중학생 때 내가 지었습니다. 넓고 푸른 들판, 좋잖아요? 그렇게 살자는 마음에 지은 거지요.”

―중학생 때 벌써 호를 지으셨군요. 혹시 어릴 때부터 아는 것이 많은 아이셨어요?

“나름 머리가 좋았어요. 세살 때 엄마 등에 업혀서 딱 한번 외갓집에 다녀왔는데도 나중에 그 위치를 기억했어요. 한자를 좋아해서 국민학교 입학 전에 이미 4천자나 외우고 있었고요.”

―4천자라니 믿을 수가 없어요.

“국민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하고 한자 대결을 했는데도 이겼지. 그 정도로 한자에는 자신이 있었어요. 그런데 중학교 때 선생 실수로 100점인 시험 점수가 20점이 된 적이 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억울해.”

할아버지의 고향은 경기도 김포의 “완전 시골”이었다. 서울 마포까지 통통배가 다니던 시절, 그 배를 타고 나가 경복중학교(서울시 종로구) 입학시험을 봤다. “경쟁률이 셌지만 턱 붙었”다.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치과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의사 되는 게 원래 꿈이셨나요?

“나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빽’ 없으면 취직도 못 했어요. 병원 개업하면 밥이야 굶겠나 싶어서 서울대 치과대학에 들어갔어요. 중앙대 국문과도 2차로 봤는데 거기도 붙었고. 친구들보고 둘 중 어디 갈까 했더니 서울대가 낫다 하데요. 뭐가 낫느냐 물었더니 등록금이 싸다는 거예요. 그래서 치과대학이 뭐 하는 데인지도 잘 모르고 갔어요. 그런데 공부하다 보니까 내 성격에 딱 맞아요.”라고 전했답니다.

할아버지는 소뿔로 치아 모형을 만들던 실습 시간을 어제 일처럼 기억했다. 남들이 하나 만들 때 자신은 일곱개를 만들어 학우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했다. “모형 그거 하나 받으려고 친구들이 나한테 아부를 많이 했다”며 할아버지는 웃었다.

―병원 운영은 잘하셨어요?

“내가 고집이 세서 돈을 잘 못 벌었습니다. 환자도 가려서 받고. 환자 태도가 신통치 않으면 ‘네 돈 아니어도 산다’는 기분으로 조금이라도 예의가 없으면 진료를 안 했어요. ‘장사’가 잘 안되니까 이사를 많이 다녔는데 병원에는 늘 파리만 날렸어요. 간호사 월급 줄 돈도 없어서 나 혼자 일할 때가 많았어요. 청소도 내가 직접 하고. 그래도 아내가 돈을 벌어서 예순한살 때 치과를 아예 그만두었지요.”

―아내께서요? 어떻게요?

“우리 마누라가 붓글씨를 잘 쓰니까. 여기저기 가르치면서 돈을 벌었지요. 유명한 사람도 가르치고 그랬다고.”

할아버지는 거실을 천천히 돌면서 아내 자랑을 했다. 거실 벽에는 아내가 직접 썼다는 고운 서예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할아버지를 인터뷰한 방은 아내가 붓글씨를 쓰고 가르치는 작업실이기도 했다. 방을 가득 채운 널찍한 나무책상은 오랜 세월 사람의 손을 타서 반들반들했고 벽에는 다양한 크기의 붓이 가지런하게 세워져 있었다. 먹이니 벼루니 하는 도구도 사용하는 주인 없이 방치됐다기보다 여전히 생생한 기운을 뿜었다.

―아내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25살 군의관 시절에 중매쟁이 소개로 얼굴도 보지 않고 약혼했습니다. 결혼은 6개월 뒤에 했고요.”

―어떻게 얼굴도 안 보고….

“내가 7남매 중 장남이에요. 그냥 부모가 신부 정해놓고 ‘너 결혼해라’ 하면 ‘네’ 하고 하던 시절이었잖아요. 부모가 좋다면 볼 것도 없다, 그런 식이었으니까. 아내가 서예를 잘해서 거기에 반했지요. 결국 나중에 국전에서 대상까지 탔어요.”

집안 곳곳에 할아버지의 아내, ‘늘샘’ 권오실씨의 단정한 글씨들이 걸려 있었다. 그의 글씨는 서예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아주 아름다웠다. 그는 어떤 작품을 쓰면서는 사흘 밤을 지새웠고, 한 자라도 마음에 안 들면 썼던 것을 모두 찢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만큼 서예에 열정적이었다고 한다. 아내의 서예를 곁에서 든든히 지켜주던 할아버지는 이제 매일 요양원으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내를 만나러 간다.

“아침 먹고 나면 바로 요양원으로 마누라 면회 가서 돌봐주죠. 아내는 이제 내가 누군지도 몰라요. 얘기도 잘 못하고요. 그냥 말이나 잊어먹지 않게 몇마디 주고받고 이불이나 잘 덮어줘요. 내가 치과의사면서도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느라 돈을 못 벌어올 때 아내가 나를 도왔잖아요. 이제는 내가 아내를 끝까지 책임지고 보살펴야지요.”

―그럼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세요?

“새벽 네다섯시면 눈이 떠져요. 아침에 아내 보러 갔다가 점심때 집에 와서 밥 차려 먹고 오후 시간 내내 이 방에서 보내면 하루가 다 가요.”

―지식인 답변은 하루 몇시간이나 하세요?

“대중 없지요. 밥 먹을 때 빼고 하루 종일 하기도 하고. 자다가 새벽에 깨면 잠이 잘 오지 않아요. 그때도 한번씩 들어가서 질문이 있으면 답해주고.”

전직 치과의사라는 경력 때문인지 할아버지의 답변들은 치아 관련 내용이 월등히 많다. 어릴 때부터 탁월했던 한자 능력을 발휘한 답변들도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할아버지의 답변은 번뜩이는 유머와 위트로 가득했습니다.

문 바보가 될 수 있는 방법? (저) 장난 아니에요. 너무 똑똑해서 고민이에요. 절대로 자랑하는 게 아니라 진짜 진심으로 고민입니다.

답 온달한테 가서 배우세요.(2018년 11월12일)

문 용돈 달라고 공손히 말하는 법?

답 엄마 아빠 이런 생각 해봤어요? 사랑하는 자녀가 돈 때문에 다른 애들한테 왕따당하는 꼴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2009년 8월9일)

문 이쁘게 사랑하는 법 좀 알려주세요. 여자분들, 전 남자인데 이쁘게 사랑하는 법 좀요. 여자친구에 대한 사랑은 남다른데 표현을 못하겠습니다.

답 이쁘게 사랑하려면 우선 미장원부터 가세요.(2017년 4월5일)

문 녹야 선생님 사랑이 도대체 뭘까요?

답 나는 사랑에도 종류가 많다는 것 외에는 잘 모릅니다.(2017년 3월4일)

돌아온 수호신

―언제 처음 인터넷을 시작하셨어요?

“환갑 즈음 치과 일을 그만두고 실업자가 되니 심심한데 뭐 할 게 있어야지. 실은 내가 그동안 여기저기 수필을 쓴 게 많아요. 그것들을 모아서 컴퓨터로 깨끗하게 다시 써서 정리할 생각이었어요. 사위가 사준 컴퓨터로 처음에는 타자 연습을 했지요. 수필들을 컴퓨터로 쳐서 인쇄해놓으니까 보기가 좋더라고. 그거 하다가 인터넷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았죠. 2002년인가부터 살살 인터넷을 한 거예요.”

―그럼 지식인 활동은요?

“인터넷을 하다 보니까 그런 게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았지요. 여기에 내가 아는 걸 답해야겠다 싶어서 시작한 거예요. 2004년쯤부터 했으니까 이제 14년 됐죠.”

―이제는 워낙 유명인이 되셔서 선생님 앞으로 질문이 많이 몰릴 것 같은데, 혹시 악플도 있던가요?

“많죠. 막 대놓고 욕을 해요. 이웃집 강아지 욕하듯 하는데, 그런 거는 다 지워버리죠. 많이 지웠어요.”

―상처를 받는다거나 하지는 않으세요?

“상처 받을 시기는 다 지나갔어요. 구역질이 나지만 싸우거나 욕하지는 않아요. 욕을 할 필요도 없어요. 어떤 사람들은 덤빌 줄이나 알지, 내가 하는 말은 알아듣지도 못해요.”

―선생님께 책 만들자는 제안은 없었나요?

“요즘 자꾸 교섭이 와요. 자서전 냅시다 하고. 출판사 두 군데에서 제안을 받았는데, 나 그렇게 유명인사 아니라고 거절했더니 그럼 얘기만 해달래요. 쓰는 건 자기네들이 쓰겠다고. 그런데 그러면 또 와전될 거 아니겠어요? 그게 싫어서 안 한다고 했어요.”

―그래도 살아오신 이야기를 해주시면 좋을 거 같은데요.

“이 일(지식인)을 하면서 외부와 소통을 하니까 그것만으로도 괜찮아요. 내가 거리에서 떠들 수도 없고 누구를 만날 수도 없잖아요. 집 안에 들어와서 혼자 쌀 씻고 밥하고 하다 보면 외로워 죽을 맛인데, 그래도 거기 통해서 사람들과 얘기하는 게 있으니까 좀 낫죠.”

2017년 2월과 2018년 10월 두차례 할아버지는 지식인 활동 중단을 암시하는 글을 올렸다. 사람들과 소통을 큰 낙으로 여기는 할아버지였지만 악화되는 건강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시력이 더는 받쳐주지 않아 활동을 그만두려 했지만 아쉬워하는 팬들의 요청 때문에 활동을 재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야 죽든 말든 자기 질문에 답해달라면서 사람들이 하도 아우성을 치니까.(웃음)”

―특별히 만나는 친구는 없으세요?

“초등학교 동창 여섯명이 서울에 살아요. 그 친구들을 두달에 한번씩 만나서 술 한잔 합니다.”

―만나면 주로 무슨 이야기 나누세요?

“옛날 어렸을 때 얘기지 뭐.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지겨워서 나가기도 싫어.(웃음) 경찰관 출신도 있고, 복덕방 출신도 있고, 각자 직업이 제각각이다 보니까 얘기가 모이지도 않아.”

―그 친구들도 선생님이 지식인 스타라는 사실을 아세요?

“얘기하지도 않았어요. 해도 몰라 걔네들은.”

―나중에라도 팬 미팅 한번 해보시는 건 어때요? 팬과의 만남!

“나 팬 관리 안 해요.”

―은연중에 목표로 삼고 계시죠? ‘절대신’?

“절대신은 못 될 거예요. 아직 멀었죠. 이제 마지막 단계인데 무리했다가 눈이 더 빨리 망가질 것 같아서.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내 생이 별로 안 남았어. 꼴까닥하는 그 순간까지만 하고 끝인 것이지.”

―선생님 블로그 보니까 ‘올해까지만 건강하고 싶다’는 글도 보이고, ‘빨리 죽어야겠다’는 글도 보이더라고요. 양쪽 다 마음이 이상해지는 글이었어요. 죽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가 스무살 때부터 죽음을 연구했어요. 아무래도 죽은 뒤 세상은 영 두렵고 겁이 나더라고. 근데 한 서른살 정도 되니까 차차 현실이 중요해져. 죽은 뒤 생각할 게 뭐 있나 했지요. 이제는 죽으나 사나 생과 사는 같다고 생각해요. 수학적으로 생각하자면, 둘 사이는 극과 극인데 어떻게 같냐 하겠지만 나이를 먹으면 그걸 알게 돼요.”

―죽고 나면 글을 읽을 수도 없고, 답을 달아줄 수도 없고, 아내도 못 만나실 텐데, 삶과 죽음이 어떻게 정말로 같아요?

“같아요. 같아져요. 아는 거나 모르는 거나 다 없어져버리니까 같아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갈 준비가 다 되어 있고. 예전에 우리 아버지가 ‘나 죽거든 아무렇게나 길바닥에 내버려둬도 좋고 이웃집 개가 뜯어먹어도 좋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이만큼 살고 보니까 알겠어. 죽은 목숨이야 개가 뜯어 먹든 뭘 하든 상관이 없지. 자식들이 ‘부모 돌아가셨는데 이래도 되나’ 싶으니까 장례도 치르고 하는 거지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허허.”

“아직도 모르는 게 더 많아”

―얼마 전 블로그에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왜 성탄절을 더 신나게 보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글을 쓰셨죠.(웃음) 선생님은 종교가 있으신가요?

“천주교예요. 세례도 받았는데 요즘은 ‘냉담자’가 돼서 잘 안 나가요. 아마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런 나도 이해해주실 거다 정말로 생각해서.”

―그럼 성탄절은 어떻게 보내는 게 좋을까요?

“사실은 조용히 지내는 게 좋지요. 나도 젊었을 때는 명동을 휩쓸고 돌아다녔죠, 술 먹는다고.(웃음)”

―선생님은 신나게 노시고 지금 젊은 사람들한테는 놀지 말라고 하시는 거예요?(웃음)

“그냥 경험자로서….(웃음)”

―새해 소망이 있으시다면요?

“연말이라 이번 해를 정리해보고는 있는데, 내년 소망은 없어요. 내가 몇살까지 살지 모르는데 계획이 무슨 소용이에요. 소망이 있어봤자 이룰 수 있을지 자신도 없는데요. 그저 내 식대로 살다가 가는 거지. 손가락질 안 받는 길로만 가면 됩니다.”

―<한겨레>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좋아요.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나중에 다 회수가 돼. 죽으면 끝이지만 살아 있을 때는 어떻게든 돌아오더라고.(웃음) 나도 지금 팬들이 보내주는 관심들, 과자들 보면서 내가 했던 착한 일들이 이렇게 돌아오는 거구나 싶어서 기뻐요.”

―여전히 궁금한 게 많으시죠?

“그럼요. 아직도 내가 아는 거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아요.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가 참 크지요. 이 재미는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못 느껴요. 그게 진짜 재미지.”

2018년 한국 사회는 더 이상 노인이 존중받는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쪽으로 성실하게 나아가고 있다. 공공장소와 대중교통에서 호통을 치기 일쑤인 존재, 이것저것 불만만 가득하고 가르치기 좋아하는 꼰대 같은 존재, 도대체 말이 안 통하는 존재, 무시하고 외면해버리는 게 차라리 속 편한 존재가 돼버렸다. 노인을 지칭하는 혐오 언어들도 만들어져 젊은이들의 입을 타고 흐른다. ‘존경받는 어른’과 ‘꼰대 노인’ 사이엔 서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거리가 생겼다. 조광현 할아버지는 그 간극을 좁히며 오늘도 ‘독수리 타법’으로 젊은이들과 만난다.

―‘지식인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건 마음에 드세요?

“사람들이 어떻게 부르든 관심 없어요. 미친 영감이라고 불러도 좋고 거지 영감이라고 불러도 좋고. 다 좋아요.”

2013년 8월11일 지식인에 글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왜 지식인에는 현명한 답을 원하는 질문이 없는가. 자기계발에 도움이 되는 글이 너무 없다. 연예인 누구 예쁘지 않냐는 둥 하나같이 애들 장난 같아서 답변 달아주는 재미가 없다.”

그 아래 조광현 할아버지가 이런 답변을 달았답니다.

“어떻게 그런 재미없는 질문만 보셨을까. 진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질문과 답들이 많이 있어요. 열심히 찾아보세요. 옛말에 부처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음미해볼 말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전했답니다.

십년이 넘도록 ‘그다운 것’을 찾아가며 세상의 궁금증에 답해온 녹야 할아버지. 2019년에도,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주 오랫동안, 그 녹색 벌판을 계속 수호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burupdant